1910년 일제에 합병담함으로써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식민지 상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민족주의의 일차적 과제는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것이 되었습니다.
합병과 함께 일제는 한국을 영구히 자신의 한 부분으로 만들기 위한 조처를 했습니다.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실시하는 자본주의적 개혁과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문명화’로 미화하면서 한국의 문화를 구시대적인 것, 야만적인 것으로 비하했습니다. 또한 한국 역사를 왜곡하고 일선동조론을 내세워 민족적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보통학교에서조차 일본어를 교수 용어로 사용하여 민족의식을 싹부터 자르려고 하였습니다.
1. 3․1운동
‘문명화’ 사업을 추진하는 수단으로 택한 것은 야만적 폭력이었습니다. 이른바 무단통치로서 헌병경찰제를 채용하여 새로운 법령 준수와 질서유지를 강요하고,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구석구석 감시했습니다. 만약 그 지시에 따르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태형을 가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또 ‘문명화’라고 하면서도 정치적 권리는 전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국인들의 불만은 1919년 3.1운동으로 폭발했습니다. 3.1운동에는 당시 약 1,700만 명의 인구 중 약 200만 명의 군중이 참여했습니다. 또 지역적으로도 전국 218개 군 가운데 7곳에서만 소요가 없었습니다. 희생자 수는 일제 발표에 따르면 사망자 553명, 부상 1,409명, 체포 12,522명, 한국 측 주장은 사망자 7,500명, 부상 15,000명, 체포 약 45,000명입니다. 운동은 공간적으로는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발화하여 이것이 철도 연선의 지방 도시로 퍼져 나가고, 다음에는 이것이 다시 농촌 내부 지역으로 전개되어 갔습니다. 또 그 주동자를 볼 때도 처음에는 학생이나 종교적 지도자 등 지식층이 주도하다가 나중에는 지방사회 내부의 민중층에서 운동의 주도자가 나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부 극소수의 친일파와 자본가를 빼놓고는 각자 자기가 처한 사회, 경제적 위치에서 민족의 대의를 위해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민족자결주의, 해외 혁명의 소식에 자극받아, 폭력과 야만의 시대가 가고 인류 평화의 새로운 시대적 조류 속에서 조선인들이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임으로써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의 폭력에 맞서 싸웠습니다.
2. 3.1운동의 의의
3.1운동은 최고조에 달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제의 온갖 모함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고려시기 이후 성립되어 온 한국 주민집단은 그동안 쌓아온 역사와 문화와 개항 이후 전개해 온 갑오동학농민전쟁, 의병투쟁 등 반제투쟁을 통해 꾸준하게 키워 온 역량을 바탕으로 식민지배의 폭력성에 맞서 맨손으로 싸웠습니다. 이와 함께 이 운동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이 투쟁을 계기로 민중의 민족적, 계급적 자각이 크게 고양되었으며, 민족으로의 결집을 일단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망국의 현실에 대비되는 일제의 발전하는 모습, 그들이 만들어 낸 문명의 탈을 쓴 온갖 선전에 물들어 민족적 혐오감, 무기력감에 빠져 있을 때 방방곡곡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번져 간 만세의 함성은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고 민족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3. 3.1운동 이후
3.1운동에서 거족적 저항을 경험한 일제는 1910년대의 무단통치를 포기하고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부분적으로나마 허용하였습니다. 이는 민족적으로 각성된 한국인들을 종전과 같이 무단적 방법으로는 더 이상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며, 한국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며 신문, 잡지를 발간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리고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운동을 전개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생각들이 개진되고 상호 토론을 거치며 민족과 관련된 개념들이 분명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도래하리라고 믿었던 자유, 평등이 평화 시대는 오지 않았고, 그토록 믿었던 영미 등의 서구 문명국가들은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의도가 없었습니다. 또 아무런 조직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번져 갔던 3.1운동도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면서 한국인들은 실망 속에서 현실 타개를 위해 다른 방도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4. 실력양성운동
민족주의 계열 가운데 타협적 세력은 실력양성운동을 벌여 나갔습니다. 설사 일본이 허용한다고 해도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사실인 만큼 먼저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신문화를 건설해야만 독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서는 근대적 산업의 건설과 함께 문화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이 전개한 운동이 바로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건설운동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용인한 후에 우리 민족의 독특한 문화를 건설하자는 일종의 문화적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민족주의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국민주권에 기초한 국민국가의 건설이라고 할 때 이들은 민족주의자라고 자칭했음에도 그 기본적 과제 달성에는 가장 미온적이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5.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연해주와 일본에서 유입되었습니다. 1918년 4월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한인사회당이 결성되었고, 이는 신민회의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로 변신하여 세운 것이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은 실력양성운동세력과는 달리 이후 대중들의 생활과 직결된 농민운동, 노동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건한 사회주의 세력은 일제와의 타협적 색채를 짙게 띠어 가던 실력양성운동론자들에 대항하여 1927년 1월 신간회를 결성합니다. 신간회는 합법단체의 틀 속에서 일제 식민 통치의 폐해를 공격하면서 각지에서 노동운동, 소작쟁의를 도왔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이 한국인 노동자, 농민과 함께 투쟁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세력보다 민족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들 자신이 민족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실력양성론자들에게 사대주의자로 조소당하였습니다. 한편 사회주의의 영향과 도움을 받아 일제에 대한 저항을 지속한 농민 노동자들은 이러한 투쟁을 통해 민족의식을 강화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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