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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본 한국사

근현대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전개 : 애국계몽운동과 한국 민족주의의 방향

by bulddong 2025. 3. 10.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한 대한제국의 보호국으로의 전락은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자 민족 각성의 일대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식인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지방에 묻혀 있던 유생층 일부는 이제까지의 척사위정적 대응의 한계를 자각하고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상경하여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거나 향리에서 직접 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서구의 문명을 적극 받아들여 힘을 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때 이들이 내세운 구호가 바로 식산흥업과 교육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국적으로 2,000여 개의 학교가 세워지고, 근대적 산업을 일으키려는 시도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기관지를 발행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했습니다. 그 지향하는 바는 다양했지만 개인은 국가라는 유기체의 한 부분이고, 국제무대에서 국가와 민족을 단위로 하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애국심,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취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습니다.

근현대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전개 : 애국계몽운동과 한국 민족주의의 방향

 

1. 애국계몽운동 세력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문명화사업으로 미화하고, 그 결과 한국이 자립할 능력이 생기면 물러갈 것이라고 한국인들을 기만했습니다. 또 아시아연대론을 유포하여 서양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자고 유혹했습니다. 실력을 하루빨리 키워서 자주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계몽운동가 대부분은 이에 현혹되어 일제의 통감정치에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근대문명은 일본으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많은 지식인은 일제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므로,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결국 일진회처럼 근대화, 문명화를 위해 민족을 포기하고 합방을 청원하는 부류까지 나타났으니 민족주의가 문명화에 종속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애국계몽운동 세력이 민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근대화론, 사회진화론에 빠져 일반적으로 물리적 저항은 포기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2. 의병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력으로써 일제에 저항한 것이 바로 의병이었습니다. 이 단계의 의병투쟁은 명망 있는 유학자들이 지도하는 양상을 벗어나 지방의 무명 유생, 또는 일반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의 의병장이 등장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평민의병이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개항 이후 전개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일제 자본주의의 침략하에 몰락하던 농민들, 일제의 철도부설, 군사기지 설치 등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주력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의 전투력은 1907년 일제에 의해 해산된 군인들이 무기를 가지고 의병대열에 참여하면서 배가 되었습니다. 의병항쟁은 1908, 1909년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인, 일본상인들, 또는 그 앞잡이인 조선인 관리, 일진회 회원 등을 공격하거나 그 기관인 세무서, 우체국, 헌병대 등을 공격했고, 때로는 조선인 지주들도 공격했습니다. 이들이 내건 반일적 구호는 여전히 유교적 근왕주의를 바탕에 깐 것이었지만 일제의 문명화정책의 실체를 몸소 겪은 사람들의 투쟁이었으므로 현실성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대한제국 말기 의병투쟁의 흐름은 이후 31운동과 1920~1930년대의 농민, 노동자 운동으로 이어져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강력한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애국계몽운동가들의 주류는 의병투쟁을 세시를 파악하지 못한 탓으로 돌리고 참가 농민들에게 각자 향리로 돌아가 생업에 힘쓸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습니다.

 

3. 단재 신채호

동양연대론이라는 기만적 논리에 지식인들의 민족의식이 혼미를 겪을 때 그 오류를 짚고 나온 인물이 단재 신채호였습니다. 그는 전통적 유학적 소양을 갖춘 다음에 근대적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인 개신유학자였습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그 밖에 여러 학회지에 발표한 글을 통해서 그는 초기에는 우승열패의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열국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민족을 구해낼 수 있는 영웅의 출현을 축구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민족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면서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 주체로서의 국민, 그 국민의 정신을 유지하는 바탕이 되는 국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 상황 속에서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그 바탕이 되는 우리의 고유한 역사, 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국수에 대한 강조는 이 시기 싹을 틔운 민족주의 사상의 한 특징이었습니다.

신채호는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을 어지럽히는 일본인들의 사서(史書)’에 대항하여 1908독사신론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여 한국사의 주체는 단군을 그 시조로 하는 부여족이라고 하여, 민족 결집의 전제라고 할 민족사의 줄기를 세웠습니다. 또 망국 직전인 19202월에 쓴 ‘20세기 신국민에서는 전제 봉건의 구제도가 철폐되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건설을 민족주의의 과제로서 제시했고, 동시에 한국인들이 그 주인공이 될 자격을 갖출 수 있어야만 국가의 명맥을 보존하고 나아가 열강의 한 구성원이 될 수 있으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채호는 한말 일제의 문명화 논리, 아시아연대론, 근대주의 속에서 방향을 잃었던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바로잡고, 한국 민족주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4. 결론

애국계몽기에는 다양한 사상과 운동이 분출하고, 이들이 상호 연대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상이한 전망의 민족주의적 경향들이 경합하면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고, 그런 상황 속에서 한국 민족주의도 발달되어 갔습니다. 다만 일제의 보호국인 상황에서 그러한 이해관계의 조정, 그에 기초한 전망들이 서로 갈등하면서 자신들을 정비할 기회가 극히 제한되었다는 것이 한국 민족주의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라가 망해 가던 급박한 상황에서 한국 주민들을 민족으로 결집시키고 동원하기 위해 같은 단군 자손이라고 하는 혈연의식, 우수한 민족문화(국수)를 내세웠던 모습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원형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