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민족 형성, 민족주의의 전개 과정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개항 이후 전개된, 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국권을 지켜내고 자주 국가를 형성하고자 했던 모든 운동을 일단 민족주의로 파악하고 이러한 운동 과정에서 한국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보겠습니다. 지구상의 각 민족, 각 국가는 그 나름의 특색 있는 형성 과정을 거쳐 왔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서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된 민족주의 개념에 억지로 우리 경험을 맞추기 보다는, 우리의 구체적인 역사 전개 과정 속에서 민족주의 및 민족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겠습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고, 이후 조선은 제국주의, 그중에서도 일제의 국권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조선의 국권을 위협하고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이 위기에 직면하여 조선의 각 사회집단은 나름대로 일정한 대응 방안을 제시했는데, 그 역사적 정당성에 따라 대중의 참여도에서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1. 척사위정사상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전통적 지식인인 유생층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흔히 위정척사파로 불리는 이들은 이미 개항에 앞서 병인양요, 신미양요라는 프랑스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주자학적(朱子學的) 화이관(華夷觀)의 입장에서 서양인들을 이적(夷狄)만도 못한 금수(禽獸)로 보고 이들과의 통교를 반대했습니다. 만약 이들과 통교하게 되면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이 파괴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서구의 기계제 제품이 들어와 우리의 농산물과 교역될 때의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이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방안으로 내놓은 것은 내수외양론이었습니다. 즉 안으로 주자학적 가치를 다시 닦고 천명함으로써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자는 것이었습니다.
2. 척사위정사상의 한계
척사위정 사상은 조선왕조 500년을 끌어온 국가 지도 이념으로서의 위치, 조선 후기 이래로 키워 온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에 둔 것이었습니다. 민족주의가 민족주의인 까닭은 국가와 그 주민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때 서구 제국주의가 침범해 올 때 이에 맞선 이들의 태도는 ‘민족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을 결집해 낼 수 있는 이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는데, 이들의 사상적 기반은 주자학적 화이관, 춘추학적(春秋學的)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에 근거한 근왕적(勤王的) 충의사상(忠義思想)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조적 지배 질서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근대적인 국가 관념 또는 국민개념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이들이 새롭게 닦을 것을 주장한 주자학적 가치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삼강오륜적(三綱五倫的) 질서로서, 이미 피지배층의 저항을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척사위정 사상은 제국주의 침략을 맞이하여 최초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대응이었으나, 그 중세적 가치관을 극복하지는 못하는 한 대중을 민족으로서 결집할 수도, 또 민족주의로서 발전할 가능성도 매우 낮았습니다.
3. 개화사상
제국주의 침략은 척사위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신적, 윤리적 질서의 재정비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은 눈앞에서 물리적 압력으로 나타났으며. 더 직접적 대응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에 나타난 것이 개화파, 개화사상이었는데,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서양의 앞선 근대 문물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룩하여 독립된 자주 국가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일 급한 것이 백성들의 계몽이라고 생각하여 1883년 ‘한성순보’를 발행했습니다. 중화적 세계관을 벗어나도록 ‘지구약론’ 등의 글을 싣고, 이 밖에 ‘회사설’, ‘치도약론’ 등의 다양한 글을 실어 상업 입국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정부 내 통리기무아문 등의 개화기구에 참가하여 실무를 맡았고, 또 조사시찰단이나 영선사에 참여하여 일본이나 청나라를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으로 개혁 노력이 좌절되고, 정부 안에서 민씨 척족세력에게 개혁의 주도권을 뺏겨 그 존립 기반이 위협을 받게 되면서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삼일천하로 끝났지만 이들이 여기에서 지향한 것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철폐하고, 입헌군주제, 신분제의 철폐, 그리고 지주의 부르주아화를 통한 근대화였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청나라의 사대조공관계, 그에 입각한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치욕스럽게 생각해, 민족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근대적 화이관, 그에 기초한 사대관계는 무엇보다 먼저 철폐되어야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4. 개화사상의 한계
개화파의 주장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이와 함께 몇 가지 특징을 보입니다. 첫째 이들은 아직 민중 일반을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천부인권과 같은 개념이 없어 결국 민권을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주의적’ 목표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라는 것은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들과 연대하거나 자신들의 생각을 알리고 설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들의 사상은 ‘민족주의적’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의 힘에 의존하는 문제점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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