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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본 한국사

근현대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전개 : 갑오동학농민전쟁, 독립협회, 대한제국

by bulddong 2025. 3. 10.

한국 민족주의의 발전, 민족의 성립을 위해서는 당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들의 참여, 민족으로서의 각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농민층은 개항으로 인한 제국주의 침략의 직접적 피해자들이었습니다. 또 개항으로 촉발된 정부의 개혁 정책은 농민들에게 가중된 수렴으로 귀결되어 그 몰락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이들이 민족으로서 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순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서였습니다.

 

1. 갑오동학농민전쟁

개항 이후 불평등 조약을 기초로 전개된 대외무역을 독점한 일본, 임오군란 이후 내정을 간섭하면서 앞서가는 일본을 추격하는 청나라, 개혁 사업을 전개하는 정부의 강화된 수탈 아래 안으로 쌓여 가던 농민층의 불만은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했습니다. 동학교도들은 1892년 이래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외세, 특히 일본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표출했습니다. 이들은 1893년 보은에서 열린 교조신원을 위해 개최한 모임을 민회(民會)’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전쟁에서 이들이 내건 요구조건을 보면 이들은 자신들의 성장을 가로막은 삼정(三政)의 문란을 철폐하고, 특히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미곡 수출에 반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모순의 원인을 일제의 침략과 아울러 민씨 척족정권의 부패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흥선대원군의 등장을 기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민씨 척족세력을 제거한 가운데 이루어진 개혁 조치가 갑오개혁이었습니다. 이것은 근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발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도의 이식으로서 그 침략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갖습니다.

 

2. 갑오동학농민전쟁의 한계와 의의

갑오동학농민전쟁은 농민층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미신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근대사회에 대한 전망이 모호성 등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개항 이후 일본의 침투와 정부의 수탈 강화 속에서 민족의식, 반봉건의식을 키워 갔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갑오동학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이래로 성장하던 농민운동의 최고봉으로서, 그 실패는 가장 강력한 항일세력이 소멸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일본과 투쟁 과정에서 민족으로서 자각하게 된 것은 이후 한국 민족주의 발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근현대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전개 : 갑오동학농민전쟁, 독립협회, 대한제국

3.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청나라를 물리치고 조선을 보호국화하려던 일제의 의도는 이른바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 세력의 진출과 일제의 야만적인 왕비 살해 사건으로 촉발된 조선인들의 저항으로 좌절되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역을 맺어 양국 세력이 동시에 퇴조하여 결국 한반도에는 힘의 공백 상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대관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은 물론 만국공법상의 당당한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고자 세운 것이 바로 대한제국이었습니다.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광무(光武)를 새 연호로 정했습니다. 이어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1899년 제정,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고, 황제가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는 ‘500년 전래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임을 확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고종은 자신과 황실 아래 모든 권한과 재원을 집중하고, 황실이 주도권을 잡고 개혁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개혁을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 양전 사업을 일으키고, 학교를 세우고, 산업을 장려했습니다. 또한 국기를 제정하는 등 국가적 상징을 만들어 국민적 통합에도 노력했습니다. 다른 한편 이권의 외국 양여 금지,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하는 등 반외세적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또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하여 교민을 조사하고 영토를 확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을 곁에서 도운 것이 독립협회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순 국문으로 된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일반 국민들을 계몽하고 황실에 대한 존경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청나라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도 백성들의 독립국 구민으로서의 자각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또 독립협회는 일제에 대신하여 조선의 국권을 위협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과 독립협회의 관계는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운동을 벌임으로써 끝나게 되었습니다. 전제황권을 지향하는 고종에게 권력 분점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 없었으며, 독립협회의 일본과 유착은 고종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4. 대한제국의 한계와 의의

광무개혁은 황제권을 강화하고 황실의 주도 아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한 것이었습니다. 주로 보수파에 의한 것이고 보수 회귀적이라고 하지만 황제권 강화를 제외하고는 갑오개혁의 성과를 대체로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비록 국왕과 극소수 측근 중심의 개혁이며, 민중 수탈적 방식을 통해 마련된 재원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그 근대화 지향과 자주독립 의지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한국인들에게 국가의 존재를 강인하게 각인시켰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족주의 발달상, 민족의 결집상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광무정권이 결국은 갑오농민전쟁을 진압한 후에 출발한 것이며, 농민층의 자발적 참여를 유발하여 민족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이념이라든가, 국가상을 제시하는데는 실패했다는 데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